간략해제 발문에 의하면 이진만의 유고는 본디 방대하였으나 대부분 화재로 소실되었다. 6대손 李潤珌(1830~1910 字: 德應)이 이진만의 遺宅인 白隱堂을 관리하게 되면서 남은 자료를 수습하여 문집을 편찬했다고 한다. 종손인 鍾輔(1846~1918, 字: 大演, 號: 溪山)와 문중의 潤範(1839~1902, 字: 殷叙)이 간행에 참여하였다. 발문의 제작연도(1893)로 보건대, 문집의 간행은 1893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표제는 白隱集이며, 卷首에 李晩寅이 쓴 序文이 있고, 이어서 目錄이 편차되어 있다. 卷1에는 詩 90題 201首가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卷2에는 輓詩 18題 18首와 疏 1편, 書 1편이 실려 있다. 卷3에는 序 11편, 記 3편, 跋 1편, 箴 1편, 上梁文 5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祭文 8편, 行狀 1편, 傳 1편, 銘 1편, 箴 1편이 있다. 권5는 附錄으로 家狀, 行狀, 墓碣銘이 각각 한 편씩 있고 白隱堂重修記와 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내용 : 이진만은 順興, 榮川 일대에서 활동했던 유학자로 그의 가문은 5대조 李汝馪이 榮川郡 浮石面 鑑谷으로 이거한 뒤로 이 지역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170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단계서원과 소수서원의 원임을 맡기도 하였으며,만년에 작은 軒을 짓고 白隱이라 자호하고 손수 꽃을 가꾸며 여생을 보냈다. 權斗經, 李光庭 등과 종유했다. 젊은 시절에 順興에 지방관으로 내려온 蔡成胤과 그의 아들 蔡應萬과 수창한 시도 있다. 《朱子語類》․《性理大全》․《大學衍義》․《周禮註疏》․《陸宣公奏議》 등을 초록하여 《大成集說》 16권을 편찬하였다고 하나 현전 여부는 알 수 없다.
내용제목 白隱集 내용개요 청구기호 〈古 3428-742〉
권제 권제목: 白隱文集序 (1)
李晩寅(1834~1897)이 이진만의 후손 李鍾輔의 부탁을 받고 쓴 서문. 이진만의 自傳 「白隱翁傳」의 “白屋에 처하면서 부귀에 급급해하지 않고, 白衣를 끌면서 빈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自序와도 같은데 외람되이 서문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의 문장이 渾厚醇古하여 조탁하거나 난삽하지 않다고 평하고, 후손들의 정성으로 문집을 간행하게 된 경위를 서술하였다.
請錦城大君立祠丹溪書院勿撤疏 (8) 1719. 아홉 곳의 철훼 대상 서원에 포함된 丹溪書院의 철훼를 반대하는 상소문. 단계서원은 錦城大君 瑜(1426~1457)와 文節公 金淡(1416~1464)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端宗이 종묘에 陞祔되고 사육신도 복권되어 사당에 제향되었으므로, 세종대왕의 여섯째아들로서 사육신과 같은 출처를 보인 錦城大君을 배향하는 단계서원은 남겨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이다.
與宋昌伯-大振 (10) 회합의 약속을 어긴 일을 사죄하고자 宋履昌(1678~1715)에게 보낸 편지. 약속을 어긴 일은 하루의 신의를 잃은 것에 불과한데, 송이창이 백년의 신의를 잃은 것처럼 책망하니 후회하고 자송한다는 내용이다.
祭儀述遺訓序 (1) 1736. 이진만의 부친 李基定이 남긴 유훈에 대한 서문. 유훈의 주요내용은 제사에 관한 것으로,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들어 가문의 유풍을 실추시키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世好契序 (2) 羽溪李氏의 종친들이 결성한 계회의 서문. 계회를 世好라 이름한 까닭은 일시적으로 우호를 맺는 것이 아니라 자제들이 부형의 우호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丙丁契帖序 (3) 丙辰年(1676)과 丁巳年(1677)에 태어난 동향의 인물들과 맺은 계회의 서문. 마을 20리 안팎의 사람들이 봄가을로 한번씩 모여서 자연을 벗삼아 화목을 다지기로 다짐하는 내용이다.
信義契序-居泮時 (4) 1709. 이진만이 성균관에 있을 때 유생 10여명과 信과 義를 창달하기 위해 맺은 계회의 서문. 서로 책려하고 우의를 다지기로 하는 내용이다.
道講書堂學錄序 (4) 1721. 權大中(字: 孟稱)이 편찬한 道講書堂의 講學錄에 대한 서문. 이진만이 孫以雄(字: 萬夫)의 초청으로 愚溪의 道講書堂을 방문하자, 權大中이 그가 지은 講學錄을 보여주며 글을 청하였기에 써준 것이다.
贈別趙九卿序 (5) 1705. 가솔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가는 趙九卿을 전송하는 글. 조구경은 이진만과 절친한 친구 사이로, 그의 서울 집은 한강 남쪽 압구정 동쪽에 있었다. 금란지교를 맺은 친구로서 마음이 멀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라며 우의를 다짐하는 내용이다.
贈關西李寢郞-萬秋-序 (7) 관서로 돌아가는 莊陵參奉 李萬秋에게 써준 글. 1년 전 가을 이진만은 장릉참봉으로 영월에 내려온 이만추와 함께 三溪書院, 陶山書院, 伊山書院, 丹溪書院 등을 배알하고 산수를 유람하였다. 지난날을 추억하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送申上舍-鎭夏-赴寢郞恩命西歸序 (8) 참봉으로 부임하는 申鎭夏(字: 士重)를 전송하는 글. 신진하는 順興에 부임하는 큰 형을 따라왔다가 白雲洞書院에서 이진만을 만났다. 이진만은 그의 풍골이 훤칠하고 담론이 뛰어나 각별하게 여겼는데, 이번에 毅陵參奉으로 임명되어 이별하게 되자 글을 써준다고 하였다.
龍澗集序 (9) 南明晉(1698~1755, 字: 德能)이 가져온 조부 龍澗公 南斗元(1655~1713, 字: 大樞)의 유고 2책에 써준 서문. 이진만은 소시적에 그를 만났는데, 언사가 弘暢하고 문사가 박식하였다고 한다. 남두원이 《南宗通紀》 5권, 《外系通錄》 1권을 엮은 일, 從曾祖父 賁趾 南致利(1543~1580 字: 義仲)의 逸稿를 수습하여 魯林書院에 刊藏한 일 등을 거론하였다.
台庄草廬序 (10) 소백산 남쪽 台溪 옆의 초가집에 은거하는 張生員의 시문집에 대한 서문.
同宗九老會序 (11) 1744. 羽溪 李氏 가문의 九老會에 대한 서문. 慶尙道 奉化郡 沙堤의 觀稼堂에서 우계 이씨 일문의 노인들을 모셔 잔치를 열고, 이 때 지은 시를 모아 成冊하고 서문을 쓴다고 하였다.
愚谷書院重修記 (12) 1730. 基川 愚谷書院을 중수한 경과를 기록한 글. 우곡서원은 柳雲龍(1539~1601 字: 應見, 號: 謙菴), 李埈(1560~1635, 字: 叔平, 號:蒼石), 黃暹(1544~1616, 字: 景明, 號: 息菴)을 제향한 곳으로, 基川(풍기) 芙蓉山 아래에 있다.
麴巖亭記 (13) 1698. 柳君이 누룩바위(麴巖)에 다녀와서 지은 글을 보고 쓴 기문. 이진만은 1697년 관동을 유람할 때 치악산에 올라 누룩바위를 찾은 일이 있었는데, 1698년 봄 柳君이 누룩바위에서 여러 사람들과 지은 시를 가지고 와서 이진만에게 글을 청하기에 옛일을 회상하며 써준 것이다.
順受窩記 (14) 1724. 順興 동쪽 鑑溪에 조그만 초가집을 짓고 사는 주인 李公의 화갑을 기념하여 쓴 기문.
族兄松關公-錫智-省墓圖跋 (16) 족형 李錫智의 省墓圖에 대한 발문. 족형 이석지는 궂은 날씨에도 매일같이 성묘하여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그의 아들 漢英이 畵師를 구해 이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내용이다.
御筆九字宣賜泮宮三箴-幷序 (16) 1732. 영조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尊聖廟 正士習 務誠實”이라는 어필을 내리자 이를 보고 감읍한 이진만이 각각의 조목을 부연하여 지은 글이다.
詠歸樓上樑文 (18) 1722. 白雲洞書院 동쪽 개울 건너편에 지은 詠歸樓의 상량문. 영귀루의 너비는 14칸, 높이는 3길이며 70여명의 생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이다. ‘詠歸’의 뜻은 曾點의 고사에서 따온 것임을 밝혔다.
紹修書院食樓上樑文 (20) 1719. 紹修書院에 지은 食樓의 상량문. 소수서원은 文成公 安珦을 배향한 곳으로, 이미 直方齋, 景濂亭 등의 건물이 있었다. 1719년 9월 강당을 중수하면서 단청을 올리고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도록 넓힌 경과를 기록하였다.
錦城壇典祀廳上樑文 (22) 1719. 錦城大君의 제단을 지을 때 쓴 상량문. 금성대군은 端宗이 양위하고 물러나자 順興府使 李甫欽(1397~1457, 字: 敬夫, 號: 大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丹溪書院食樓上樑文 (24) 丹溪書院의 食樓를 지을 때 쓴 상량문. 단계서원은 文節公 金淡을 봉안한 곳으로, 다른 건물들은 이미 모두 구비되었으나 식루가 없었다. 이에 天群峰 끄트머리에 鷹坊山과 鶴駕山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식루를세우고 그 경과를 기록하였다.
梅鶴堂上樑文 (26) 1733. 文節公 金淡과 伯巖 金玏(1540~1616, 字: 希玉)의 후손인 孤山 金鋈(1596~1660)이 군수를 지내다 벼슬에서 물러나 梅鶴堂을 짓고 은자의 삶을 살았다. 이 글은 김옥의 후손이 梅鶴堂을 중수할 때 지은 상량문이다. 매학당이라는 이름은 梅妻鶴子의 고사로 잘 알려진 林逋의 西湖 故事에서 따온 것임을 밝혔다.
社稷壇祈雨文-代府使作 (1) 社稷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부사를 대신해 지은 제문.
太白山食沙井祈雨文 (1) 太白山 食沙井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지은 제문.
小白山祈雨文 (2)
1732. 소백산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지은 제문. 《詩經》 「大雅」․「雲漢」 八章 형식을 빌려 지었다.
祭李密菴先生-栽-文-代人作 (3) 密菴 李栽(1657~1730)를 위한 제문. 부친 李玄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평생 성리학에 전념한 李栽의 일생을 서술하고 슬픔을 표하는 내용이다.
祭申府伯-必淸-文 (4) 竹軒 申必淸(1647~1710)을 위한 제문. 신필청의 문장과 성품, 지방관으로서의 업적을 서술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祭外舅李公-惟遠-文 (5)
외삼촌 李惟遠을 위한 제문. 성품이 점잖고 醇雅하여 가난하였지만 顔子처럼 안빈낙도한 이유원의 삶을 기렸다. 자신을 자식처럼 대해주었는데 과거에 응시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해 아쉽다는 뜻을 표하였다.
祭姨從弟成仲祥-世瓚-文 (6)
1729. 52세로 운명한 이종사촌 동생 成世瓚에 대한 제문. 이진만과는 한 살 차이로 비록 이종간이지만 친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성세찬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다.
祭安亨甫-泰國-文 (8)
서른 살에 요절한 매제 安泰國을 위한 제문. 안태국은 약관에 이미 풍채가 장건하고 재지가 기민하여 문장이 넉넉하고 필력이 호방하였다. 누이가 의지할 곳이 없고 세 딸이 어려 아버지가 죽은 것도 모르는 상황이 더욱 애통하다는 내용이다.
族兄松關公-錫智-行狀 (9)
1740. 6대조를 같이하는 족형 李錫智(1667 ~1729, 字: 達三)의 행장. 그의 아들 漢英(字: 亨叔)의 부탁으로 쓴 글이다. 이석지는 1693년에 모친을 잃고 1700년 부친을 잃자 양친을 합장하고 매일같이 성묘하였다.
그의 장남은 한영이 그 모습을 「省墓圖」로 그렸다. 만년에 「誠敬圖銘」을 짓고서 “操心寶鑑”이라 하며 아침저녁으로 완상하였고, 「天象圖」를 모의하여 벽에 걸어두었다. 1708년 杏溪書堂을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729년 향년 63세로 운명하였다.
白隱翁傳 (12) 부귀에 급급하지 않고 빈천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自傳. 단청을 입히지 않은 작은 초가에 白이라는 한 글자를 걸어놓고, 세상이 부귀공명을 좆아도 자신은 깨끗한 白의 뜻을 따라 은거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銘과 箴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家狀 (1)
6대손 李潤璞(1830~1910 字: 德應)이 쓴 이진만의 家狀. 이진만의 字는 孟能이며 본관은 江陵府 羽溪縣이다.
그의 5대조 성균관 전적 汝馪은 光海君 때 全恩疏를 기초한 인물로, 벼슬에서 물러나 慶尙道 榮川(順興) 鑑谷으로 이주하였다. 증조부 선무랑 成材는 李爾瞻의 잘못을 상소하였다.
조부는 熽이고 아버지는 호군 基定이다. 어머니는 眞城李氏 통덕랑 炯漢의 딸이다. 이진만은 眞城 李氏 惟遠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생몰연월일, 사마시 합격연월일이 밝혀져 있고 종유한 명사들도 들고 있다.
白隱이라는 호의 연원도 밝히고 있다. 문명이 높았다는 일화로써 文會를 주관할 때 한참 연배가 높은 丹邱 黃昌述의 글을 그의 것인 줄 모르고 장원으로 뽑았는데 나중에 황창술도 그를 인정한 사례를 들고 있다. 《大成集說》 16권을 편찬하였다
行狀 (3) 蒼雪齋 權斗經의 후손인 權世淵(1836~1899)이 지은 李鎭萬의 행장. 家狀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고 다만 종유한 명사들을 구체적으로 더 많이 밝히고 있다.
종유한 사람으로는 訥隱 李光庭, 松沙 李適意, 丹邱 黃昌述, 蒼雪齋 權斗經 등이 있다. 이진만의 품성이 방정하고 지조가 고결하였다고 평하였다.
墓碣銘 (7)
權璉夏(1813~1896)가 지은 李鎭萬의 묘지명. 家狀과 行狀을 바탕으로 썼다. 서울에서 수령들이 고을에 내려오면 그를 만나고 갔다는 일화와 浮石寺의 시회에 초대받아 문명을 떨쳤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白隱堂重建記 (9)
1883. 6. 權璉夏(1813∼1896)가 백은당의 중건을 기념하여 쓴 글. 이진만이 백은당을 짓고 은거한 뜻이 그의 조상인 桃邨 李秀亨(1435~1527)이 단종 손위 때 拱北軒을 짓고 은거한 뜻과 5대조 炊沙 李汝馪(1556~1631)이 광해군 때 因樹亭을 짓고 은거한 뜻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하였다.
跋 (12)
1893. 이진만의 방계 후손 潤範이 지은 발문. 이진만이 훌륭한 재주를 품고서도 은거하여 시문과 저술을 많이 남겼으나 화재를 당하고 남은 것이 얼마 없었다.
이진만의 후손 李潤珌이 11년 동안 白隱堂과 문집을 관리하였는데 그 사이에 백은당은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문집의 간행도 이루어졌으며, 윤범이 이 일에 시종 참여했던 까닭으로 이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백승호)